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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YOCHANG PARK INTRO

​효창공원 역사

조선왕실의 묘원 효창원이 역사적 의미를 상실하고 회복하기를 반복하며 

오늘날의 효창공원이 되기까지의 지난 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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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년 효창원의 풍경

출처 『鮮南發展史』(朝鮮新聞社, 1913)

조선왕실의 묘원, 효창원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자리한 효창공원의 원래 이름은 효창원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죽은 정조의 큰 아들 문효세자와 세자의 어머니 의빈 성씨, 그리고 순조의 후궁 숙의 박씨와 그의 딸 영온옹주의 묘지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울창한 소나무와 밤나무 숲이 우거진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했던 효창원은 1894년 청일전쟁 발발 직전 일본군부대의 불법 주둔을 시작으로 그 가치와 의미가 훼손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 국권을 피탈한 일제는 1921년 효창원의 숲을 파헤쳐 골프장을 만들고 문효세자 묘를 빙 둘러 감싼 골프코스를 만들었습니다. 1924년에는 효창원의 일부에 유원지가 조성되었고 일제에 저항해 싸운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한 비밀작전지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급기야 일제는 패망 직전 1945년 3월, 효창원에 있던 왕실의 묘를 모두 서삼릉(현 경기도 고양시)으로 강제 이장하였습니다. 

 

그렇게 효창원은 본래의 역사성과 규모, 가치를 잃고 지금의 폐쇄된 섬과 같은 효창공원으로 격하되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훼손되고 격하된 효창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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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골프링크로 사용되었던 효창공원 
출처 『朝鮮』(朝鮮總督府, 1925)

해방 이후 김구 선생이 일군 독립운동가 묘역

그러나 1945년 고난과 시련의 역사 끝에 우리민족은 해방을 맞이했고 효창공원은 백범 김구 선생의 깊은 뜻으로 독립선열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공간으로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김구 선생은 타향에서 숨을 다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사의 유해를 송환하여 1946년 국민장을 치르고 옛 문효세자 묘터에 안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세 의사 곁에는 언젠가 꼭 되찾아 모셔올 안중근 의사의 자리를 가묘로 남겨두었습니다. 이어 1948년 9월 중국 땅에서 순국하신 임시정부의 주석 이동녕 선생과 국무원 비서장 차리석 선생의 유해 그리고 환국 후 서거하신 군무부장 조성환 선생의 유해를 동남쪽 언덕에 안장하였습니다.

이듬해 6월 김구 선생이 민족통일의 못이룬 한을 품고 서거하시며 전국민의 애도 속에 국민장으로 치르게 되었고 김구 선생 역시 앞서간 3인의 독립운동가와 3인의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효창원 서북쪽 언덕에 안장 되었습니다.

효창공원의 독립운동가 묘역 조성 과정

1946

3의사 묘역조성

1945년 11월에 귀국한 김구 선생이 다음해 6월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골을 모시고 와 그해 7월 6일 옛 문효세자묘터에 국민장으로 안장

삼의사 묘역을 참배하는

김구 선생, 1946

1948

임정요인 묘역조성

1940년 중국 땅에서 순국한 임시정부 의장 및 주석 이동녕 선생과 1945년 해방을 눈앞에 두고 서거한 국무원 비서장 차리석 선생을 모셔 임정요인 묘역을 마련

이동녕 차리석 선생 유해봉환식, 1948

1949

김구선생 안장

1949년 6월 26일 임시정부 주석 백범 김구 선생이 민족통일의 한을 품고 흉탄에 쓰러지자 그 해 7월 5일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  

김구 선생 국민장 애도 행렬, 1949 

1946

안중근 의사 가묘 조성

1910년 3월 26일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으면 안장하고자 마련

1948

조성환선생 안장

1948년 환국 후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애쓰던 임시정부 군무부장

조성환 선생의 서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