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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OES FELL ASLEEP HERE

임정요인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

- 대한민국 헌법 전문中 -

(김구사진자료집) 1935 국무위원들.jpg

임시정부 국무위원들(1935)
죄측부터 조완구, 이동녕, 이시영(앞줄) 

송병조, 김구, 조성환, 차리석(뒷줄)
출처 백범김구사진자료집

이동녕 선생

“동지들 우리가 나라를 잃고 광복을 하고자 하면 이제 그만 분열을 딛고

손에 손 꼭 잡고 대동단결해주시오.”

“선생은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서 선두에 내세우고,

스스로는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하는 일이 일생의 미덕이었다.

선생의 애호를 받은 사람은 오직 나 한 사람이었다.

석오 선생이 별세한 뒤, 일을 만나면 당장 선생 생각부터 하게 되니

이는 선생만 한 고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어찌 나 한 사람뿐이랴.

우리 운동계의 대손실이라 할 수 있다.”  

– 김구, <백범일지>

오늘날 우리가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사를 기억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면 바로 백범 김구 선생일 것입니다. 그런 김구 선생 ‘오늘의 자신이 있을 수 있게 해준’ 선생의 타계를 추모하며 남긴 글입니다. 그 분은 바로 석오 이동녕 선생입니다.

1869년 충남 천안의 양반 명문가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고, 진사시험에도 합격한 선비였던 이동녕 선생은 유학 사상에 머물지 않고 동학농민전쟁과 청일전쟁을 경험하며 얻은 근대적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1896년 독립협회 간사원으로 활약하며 근대민권운동과 국권수호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1898년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개화∙개혁 운동을 전개하다 옥고를 치룬 선생은 출옥 후 옥파 이종일 선생의 가르침을 받으며 그가 창간한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어 선생의 근대화론을 원고 위에 마음껏 펼치기도 했습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체결에 대한문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일제의 침략행위를 규탄했던 선생은 이후 북간도 용정으로 망명 후 이상설과 함께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통한 국권회복 운동의 역량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나 식민지나 다름없는 상황에서 교육이나 언론을 통한 계몽운동 방식으로는 일제의 침략을 막아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선생은 양기탁, 이회영, 이동휘, 안창호, 전덕기 등 20명의 창건위원과 함께 무장투쟁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하게 되었습니다. 신민회는 서간도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의 모체가 된 신흥강습소과 경학사를 세워 독립군 기지를 개척했습니다. 이곳에서 배출된 독립군들은 후일 청산리 대첩 등 항일무장투쟁의 주역이 되었습니다.

김구선생과 이동녕

이동녕 선생의 장례(1940)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선생은 상해로 건너가 임시의정원의 초대의장을 맡아 임시정부 수립의 산파역을 수행했고 통합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에 이어 국무총리와 대통령 대리, 국무령, 주석 등을 역임하며 일흔의 노구가 될 때까지20여 년 동안을 임시정부를 지키며 독립을 준비하는 데에 여생을 다하였습니다. 특히 <남녀학생에게>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 <천주교 동포여> <재내외 일반 국민에게> 등 여러 차례의 격문을 발표하며 민족 대중의 각성을 촉구하면서 강력한 항일투쟁을 전개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여러 학생들이여 우리의 용기가 좌절하였는가. 아니다.

우리의 정열이 식었는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유일한 요구인 독립에 대한 결심은 더욱 견고할 뿐입니다.

오늘에 우리는 우리의 의사를 한번 더 분명히 발표하기 위하여 다시 두 손을 높이 듭시다.

적의 간담이 서늘하도록 천지가 울리는 만세를 합창합시다.

세계의 의혹을 풀기 위하여 삼천리 강산에 무수한 태극기를 높이 달아야 하겠습니다.

 

- 임정의 내무총장으로 선생이 남녀학생에게 발표한 포고문 중에서 (1919. 10. 15) –

1920년대에 들어 임시정부가 혼란기를 겪을 때에도 이동녕 선생은 임정의 재건과 독립운동세력의 대동단결을 강력히 호소하였습니다. 민족유일당운동이 좌절된 후 선생은 1930년대에 임정의 정치적 기반인 한국독립당을 창당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습니다. 이때 김구 등의 임시정부 핵심세력과 흥사단의 안창호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1932년 일어난 이봉창 의거와 윤봉길 의거 역시 선생의 결재 아래에 시행되었습니다.

 

1937년 일제의 중국 대륙침략작전으로 상황이 변하자 강력한 대일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임시정부는 광복군 편성을 서두르게 되었는데 이때 군사간부 양성과 병력 모집을 위해 일흔 넘은 노구를 이끌고 김구 선생과 함께 노심초사하며 파견을 다니던 어느 날 선생은 지병인 천식이 악화되며 급성 폐렴으로 낯선 이국 땅 기강에서 1940년 3월 13세 7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습니다. 선생은 떠나기 전 “동지들 우리가 나라를 잃고 광복을 하고자 하면 이제 그만 분열을 딛고 손에 손 꼭 잡고 대동단결해주시오.”라고 유언을 남겼고 선생의 뜻을 받들어 결국 임정 산하의 세 정당이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발족하게 되었습니다.

조성환 선생

“썩은 군대는 곧 나라를 망치게 한다.

썩은 자들을 속히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시켜야 한다.”

(1926년 10월 16일 북경) 1900년 25세의 혈기왕성한 청년 조성환 선생은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교육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친일 정치인들과 일제가 결탁하여 부정을 저지르고 군대를 부패하게 만드는 모습을 목격한 선생은 “썩은 군대는 곧 나라를 망치게 한다. 썩은 자들을 속히 이 땅에서 영원히 추방시켜야 한다.”는 마음으로 군부를 숙청하려 했지만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 받게 됩니다. 이후 무기징역으로 감형되고 3년만에 특사되어 무관계급인 참위로 임관되었지만 부정부패가 만연한 군대에 환멸을 느낀 선생은 사임을 결정했습니다.

 

이후 1907년 안창호, 이동녕, 김구 선생 등과 더불어 비밀결사단체 신민회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에 매진했습니다. 조성환 선생은 무관학교 출신으로서 최고 간부 중 한 명으로 활동했으며 신민회 동지들과 구국 방략을 협의하고 북경으로 망명한 후 이곳을 근거지로 삼으며 간도 등지를 독립운동의 터전으로 다지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 3.1운동 일어나기 전인 1918년 만주 길림에서 선포된 대한독립선언서에  김교헌, 조소앙, 이동녕 선생 등과 함께 민족대표 39명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고 실질적인 독립운동 전개를 위한 임시정부 수립을 결의하고 상해로 건너가게 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요인이 된 선생은 군무차장으로 임명되어 총장 이동휘 선생을 보좌하고 이후 군무부 위원이 되어 무장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군정부를 조직하여 군대 훈련에 힘썼습니다.

“단결은 약자의 무기다, 라는 말은 자명의 진리인 것이다.

그 단결의 길은 일시적인 권모술수에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정대한 정의와 광명뇌락의 정신을 근거로 한 당적 결합에 있는 것으로 믿는다.”

 

- <대한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선언문 중 일부

 

이후 선생은 북경에 흩어져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의 단결을 위해 안창호 선생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에 동참하고, 촉성보를 간행하는 등 단체의 단결과 단일투쟁의 중요성을 호소하며 독립운동 연합전선을 구축하였습니다. 1931년 다시 임시정부에 합류한 선생은 임시정부 군무부장직을 수행하며 당시 임정 최고 숙원사업인 광복군을 창설에 주력하여 1940년 9월 17일 마침내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습니다. 국내진공작전 실행 직전 일본의 항복으로 조국은 광복을 찾았지만 이후 한국의 독립문제에 대한 임시정부의 발언권이 없어진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광복 후에는 국내로 돌아와 대한독립촉성회 등에서 활동하며 민족국가 수립을 위해 애쓰다 1948년 74세를 일기로 서거하셨습니다.

조성환 선생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총무처 직원 일동

차리석 선생

“임시정부의 내일은 곧

군주제의 청산이며, 민주화의

새 출발을 기약함에 있습니다.

대통령을 중심으로

일사분란하게 전진하고

대동 단결합시다”

1881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태어난 차리석 선생은 1907년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민족 교육을 통해 국가를 지탱할 인재 육성에 힘썼습니다. 한편, 비밀결사 신민회의 평양지회에서 활동하며 신민회의 공화주의 사상과 교육 구국, 독립군 기지개척 등 독립운동을 위한 구체적인 방략을 익혀가던 중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치 총독암살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3년 여의 옥고를 치러야 했습니다. 1919년 평양에서 3.1운동에 참여한 후 보다 적극적인 항일투쟁의 뜻을 품고 중국 상해로 건너갔는데, 그곳에서 선생은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기자로 항일투쟁에 앞장서며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들을 연계하고 항일과 독립에의 열망을 북돋우는데 진력하였습니다.

 

1920년 국내 연통제 조직의 와해와 태평양 회의에 기대를 건 외교노선의 실패 등을 겪으면서 지도체제의 동요를 가져 왔고 1921년부터는 임정 존립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국민대표회의의 소집요구가 거세어졌을 때 차리석 선생은 어수선한 독립운동계에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파벌의 종식과 대동화합, 인화단결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는 22년 독립신문사를 떠나 임시정부에 직접 참여하며 논의의 중심에서 몸소 활로를 모색했습니다. 1932년 항주로 거지를 옮긴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김구, 이동녕, 조성환, 신익희 선생 등과 함께 국무위원에 임명되어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임시정부를 이끌었고 1935년 독립운동 진영의 분열로 임시정부가 존폐 위기에 빠졌을 때 요인들을 찾아가 설득하며 임시정부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해 노심초사하였습니다.

 

충칭 임시정부에서도 국무위원과 중앙감찰위원장을 역임하며 광복군의 대일항전을 지원하는 등 조국독립운동에 해방의 그날까지 헌신하셨습니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한 며칠 후 과로로 쓰러진 차리석 선생은 9월 9일 환국을 목전에 두고 중국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차리석 선생은 해외 혁명운동자 가운데 특히 강력한 정신력을 소유하시기로 유명하시었다.

탁월한 사무처리의 기능이나 병중에서도 최후의 일각까지 맡으신 사명을 완수하신 강한 책임감은

한국독립운동에 피가 되고 살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 1048년 사회장 당시 이시영, 김구 선생의 추모사 중에서

한국광복군 징모처 제3분처 (1941)
제일 아랫줄 오른쪽이 차리석 선생

차리석 선생의 발인 사진 (1945)

자료제공

국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한중문화협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