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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OES FELL ASLEEP HERE

삼의사

조선 민족 불멸의 독립 혼을

증외에 떨친 것은

​이 세 분이 으뜸일 것입니다.

- 김구의 삼의사 추모사中 -

이봉창윤봉길백정기.jpg

좌측부터 이봉창·윤봉길·백정기

독립투사 유해봉환식장

출처 부산시 『개항백년』

타향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들 유해 묘역을 조성

1945년 광복 후 조국으로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은 일제가 훼손한 효창원의 터에 독립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여 싸우다 타향에서 순국한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봉환하여 독립운동가의 묘역을 조성하려 했습니다. 이듬해인 1946년 박열, 이강훈 등 아나키스트계 독립운동가들은 김구 선생의 뜻에 따라 3의사의 유골 수습을 촉구하여 ‘3의사 국민장봉장위원회’를 발족하였고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하였습니다.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일왕의 생일 겸 전승축하식에 수통폭탄을 투척한 매헌 윤봉길 의사, 도쿄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폭사시키려다가 미수에 그쳐 일본군에 의해 사형당한 이봉창 의사, 중국 상하이에서 육삼정 의거를 준비해다가 실패하여 옥중에 순국한 구파 백정기 의사 그리고 그 옆에는 언젠가 조국으로 봉환되어 오리라 모두가 염원하고 있는 안중근 의사를 위한 자리가 허묘로 남겨져 있습니다.

이봉창 의사

“제 나이 이제 서른 한 살입니다.
저로 하여금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성업을 완수하게 해주십시오.”

1931년 상해 임정 국무원 회의실에서 독립운동 지도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조선 태생에, 일본인을 양부(養父)로 두고 일본인 행세를 하는 기노시타 쇼죠. 상하이 양수포(楊樹浦) 소재 일본인 인쇄소 점원, 나이 31세. 봉급을 타면 술에 취해 사치와 호사를 즐기는 건달. 일본인과 같은 행색과 말투로 임시정부에 찾아와 “당신들은 독립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일왕은 왜 못 죽입니까”라며 일왕의 처단을 촉구했던 이 청년을 김구 선생은 면밀히 조사했고 결국엔 그의 투철한 애국심과 확고한 독립사상에 큰 감명을 받게 됩니다. 1901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난 이봉창 의사(李奉昌)는 소년시절부터 일본인이 경영하는 제과점에서 고용살이와 용산역에서 기차운전 연습생으로 일하기도 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6년여동안 나고야 등지를 떠돌며 노동으로 삶을 꾸려나가기도 했지만 마음속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과 조국독립에 대한 열의를 불태웠습니다. 서른 한 살이 되던 해 안중근 의사의 동생 안공근을 통해 상해 임시정부를 알게 되었고,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몸바칠 것을 결심했습니다. 의거가 있기 전 안공근의 집에서 수류탄을 들고 마지막 사진을 찍을 때 슬퍼하는 김구 선생에게 자신은 ‘영원한 쾌락을 영위하기 위해 가는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위로의 말을 남겼습니다.

이봉창의사 선서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해 12월 한인애국단에 정식으로 가입하고 이듬해 1월 8일 일왕이 참여하는 신년 관병식을 거사일로 정하고 도쿄로 향했습니다. 경시청 정문에서 일왕이 탄 마차행렬을 향해 손에 든 수류탄을 힘차게 던졌습니다. 폭탄은 일왕이 탄 마차 뒤쪽에서 굉음을 내며 폭발했고 순간 일장기를 든 기수와 근위병이탄 말 두필이 거꾸러졌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의 위력은 일왕에게 미치지 못했고 현장에서 체포된 이의사는 그 해 9월 30일 도쿄 대심원에서 사형을 언도 받고 서른 두 살의 나이로 10월 10일 순국하였습니다. 이 의사의 의거는 일제의 심장부인 도쿄 경시청 앞에서 일본제국주의가 신격화한 일왕을 폭살시키려 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전세계 피압박 민족에게 큰 충격과 동시에 가능성을 주었고 우리 임시정부에도 새로운 자극을 주어 독립운동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윤봉길 의사

“선생님! 제 시계는 이제

한 시간 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장부가 뜻을 세워 집을 떠나면 그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 오지 않는다”(丈夫出家 生不還)"라며 23세가 되던 1930년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으로 떠난 윤봉길 의사는 이듬해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도자인 김구 선생을 만나 본격적으로 의열투쟁의 방안을 모색합니다.

1932년, 일왕의 생일과 일본군의 상해사변 전승 축하식이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다는 보도를 접하고 의거를 결심합니다. 윤봉길 의사는 의거 3일 전, 이 의거가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한민족 전체 의사임을 알리기 위해 김구 선생이 조직한 항일 무력단체, 한인애국단에 가입합니다. 그리고 거사 당일 윤봉길의사와 김구 선생은 마지막 조찬을 나누었습니다.

“선생님! 저하고 시계를 바꾸셨으면 합니다. 제 시계는 어제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이제 한 시간 밖에 소용이 없습니다”   (백범일지 중에서) 1932년 4월 29일 오전 11시 40분. 윤봉길 의사는 침략의 원흉들이 도열해 있는 단상 위로 폭탄을 투척했고 시라카와 대장 등 일본 수뇌부들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 의거로 중국은 임시정부에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다시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25세의 나이로 순국했습니다.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와

단원 윤봉길

홍커우 공원 의거 장면 기록화

백정기 의사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전북 정읍에서 출생한 소년 백정기는 1910년 일제에 의해 나라를 뺏긴 해에 겨우 15세 소년이었습니다. 어린 소년의 가슴에는 민족의 앞날에 대한 염려와 구국일념으로 일제 타도에 대한 사명을 싹 틔우게 되었습니다. 3.1운동 이후 전국 각지를 몰래 다니며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던 중 일경의 불심검문으로 구금되었으나 이름과 행적을 속이는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면했습니다.

 

의사는 국내에서의 항일활동에 한계를 느끼고 1921년 베이징으로 망명했고, 이때 이회영, 신채호 등으로부터 무정부주의(아나키즘)의 영향을 받게 되었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이후 일대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제의 경계와 제제가 강해졌고 이에 의사는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하고 그 기관지로 자유신문을 발행하여 서사(誓死) 항일투쟁을 고취했고 무장투쟁단체 흑색공포단을 조직하여 일제 기관을 파괴와 침략 원흉 처단을 계획했고 민족을 반역한 친일파들을 처형했습니다.

“나의 구국 일념은 첫째, 강도 일제(日帝)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쟁취함이요. 둘째는 전세계 독재자를 타도하여 자유․평화 위에 세계 일가(一家)의 인류공존을 이룩함이니 왜적 거두의 몰살은 나에게 맡겨 주시오.” 1933년 3월 상하이 훙커우에서 중국 주재 일본 공사 아리요시가 비밀회의를 갖는 다는 정보를 입수한 의사는 아나키스트 동지 이강훈, 원심창과 함께 육삼정 습격을 도모했습니다.

 

윤봉길 의사가 사용했던 것과 똑 같은 대형폭탄을 선택했고 윤봉길 의사 의거 후 김구 주석이 상해를 떠날 때 오면직에게 맡긴 폭탄 2발 그리고 중국인 동지들로부터 구한 권총 2자루, 탄환 20발, 수류탄 1개를 준비한 후  폭탄 투척 연습까지 하며 거사에 실수가 없도록 사전에 치밀한 준비를 했지만 일본인 밀정의 밀고로 거사 실행 직전에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주동자를 자처하며 젊은 동지들을 보호했던 백정기 의사는 동지들의 구명운동에도 불구하고  무기 징역을 언도받은 백정기 의사는 이사하야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향년 39세로 옥중에서 순국하였습니다.

육삼정 의거를 보도한 신문기사

“나는 몇 달 더 못 살 것 같소.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마오.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라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 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그는 그가 남긴 유언대로 마지막 모의를 함께 했던 이강훈을 비롯한 아나키스트계 동지들의 노력으로 해방 후  조국으로 다시 돌아와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의거는 실패하였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에는 일본제국주의의 대륙침략음모가 드러나게 되었고 중국인들의 항일 의식은 항일 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자료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매헌윤봉길기념관

백범김구기념관

부산광역시